📖 유배지에서의 다산(茶山)의 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 茶山
다산 정약용은 유형원(柳馨遠) · 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후기 경세치용 (經世致用)을 주장하면서 토지개혁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한 실용적인 학자였습니다.
다산은 두번의 유배를 떠났는데, 첫 번째 유배는 1789년 가톨릭 교인이라는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서 海美(해미)에 10일간 유배 갔습니다. 이때 남긴 한시는 없습니다.
두 번째 유배 는 1800년 正祖(정조) 死後(사후), 노론 벽파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노론 벽파는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주문모 신부를 끌어드려 역 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사사옥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매형 이승훈, 둘째형 정약전, 그리 고 셋째 형 정약종 등과 체포되어 2월 27일 경상북도 장기(영일만)로 유배되었습니다. 10월에는 큰 형님 정약현의 큰 사위 곧 다산의 조카사위인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서울로 압송된 후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818년 9월에 해배되었습니다.
다산은 <又示二子家誡 (우시이자가계)> 에서 말하기를 “근래에 내가 상자 속의 옛 시의 원고들을 점검해 보니, 귀양살이하기 이 전엔 金馬玉堂[금마옥당, 한림원과ㄴ 홍문관]의 사이를 훨훨 날던 때였는데도 그때 지은 시편들은 대개가 쓸쓸하고 괴롭고 우울한 내용이었고, 장기에서 유배 살던 때에 지은 시에서는 더욱 우울하고 슬픈 기상이었으며, 강진에 귀양 온 이후의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활달하며 확 트인 시어들로 되어 있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유배 체험의 내면화 양상으로 1차적으로는 슬픔과 격정, 자기 결백을 거친 후 창조적 상상력으로 연결시켜 고통을 완화시킨 결과인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시는 정약용의 <자소 (自笑)> 의 한 구절입니다. 위의 자소적인 문체는 유배문학의 심리 변화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으로 모든 일의 원인이 세상 탓이며, 자신의 강직한 성품 탓에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자신을 성찰하기 보다는 남이나 세상을 탓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위의 시는 다산의 <아사고인행(我思古人行)> 의 한 구절입니다. 슬픔과 분노, 자탄 그리고 남의 탓을 넘어서 이제는 修身(수신)으로 자신을 되돌아 보기 시작한 시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야박한 풍속 참으로 왜들 그럴까? 뜬 소문 들으면 아직도 불안하기만 해. 별수 있나 그대로 받아 들여야지 세상살이란 원래가 어려운 길인데” 라고 하며 현실의 처지를 수용하였습니다.
<古詩(고시)> 27수 중 제4수는 당쟁의 폐해를 지적하고 난 후 “그 뉘라서 큰 잔치를 열어, 화려한 집에다 장막을 둘러치고. 천 항아리에 빚어 넣은 술과, 만 마리 소 잡아 만든 전골로, 함께 앉아 옛 폐습 다 버리기로 하고, 평화로운 복을 맞게 하려나.” 로 노래하여, 복된 미래 로 나아가고자 했다.
또한 “임금님 은혜로 목숨은 남았으나, 촌 노인들 내 모습 가여워하네. 나라 다스리는 방책을 알려거든 마땅히 농부들께 물어야 할 일” 이라고 하여, 농민이 나라의 근본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또한 장기 농가에서 “어저귀(아욱과 남새) 먼저 베고 삼밭에 호미질, 늙은 할멈 쑥대머리 밤에야 빗질하며. 일찍 자는 첨지 영감 발로 차 일으키네. ‘풍로에 불붙이고 물레도 고쳐야 지.’” 라고 하여, 시골의 촌로들을 비속하게 여기지 않고 시의 소재로 활용하였습니다.
다산(茶山)은 유배생활 중 굴원의 <어보사 漁父辭> 모방한 <오즉어행 烏鰂魚行> 에서 자신의 결백을 노래하였습니다. 오죽어행은 오징어와 백로의 대화체입니다. 오징어가 물가에 노닐 다가 희기가 눈결 같은 백로에게 하는 말이 ‘나는 뱃속에 먹물이 있어 한 번 뿜으면 물고기들 이 지척도 분간 못해, 입만 벌리면 배부르게 잡아먹을 수 있지. 백로 자네는 유별나게 희기만 하여 물고기들이 먼저 알아보고 달아나지. 그러니 적당히 검게 해서 편안하게 살아 보세.’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백로의 대답과 오징어의 반응을 시로써 보겠습니다.

오즉어행은 가난하더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꼿꼿하게 처신하는 백로와,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오징어를 대조시킨 작품으로, 굴원의 내용을 點化(점화), 換骨奪胎(환골탈태)한 시입니다. 오즉어행의 오징어와 백로의 대화는 어보사에 나오는 굴원과 어보(漁父)와의 대화 내용을 우화시로 변용하여, 新意(신의)를 더했기 때문입니다. 굴원의 어보사는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삶인가를 밝힌 글입니다. 이에 다산은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백로에 비유하여,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나타냅니다.
가을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1801년 10월 20일 밤에 다시 체포되어 27일 서울로 압송되어 옥중에 있다가 11월 5일 성은으로 인해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현으로 이배되면서 소동파 시에 차운한 시를 남겼습니다. 이는 소동파가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의 슬픈 심정을 밝힌것처럼, 지금 다산도 흑산도로 유배를 가는 형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처지에 슬픈 마음이 든것입니다.
다산의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소극적자세를 넘어 적극적 자세로 전환되었습니다. 유배생활을 통해서 농민을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그들의 삶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1803년에는 강진에서 일어난 사건을 <애절양 哀絶陽> 으로 그려 당시 군 정의 문란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여,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의 실상을 생생하게 반영하였습니다. 또한 다산의 현실 비판적 태도는 여러 문학에서 나타납니다. <채호 采蒿> 와 <발묘 拔苗> 는 흉년으로 인해서 쑥으로 끼니를 때워야하며,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아들을 한명 바쳐서라도 비만 오면 좋겠다는 아낙네의 처절함을 담았습니다. <교맥 蕎麥> 에서는 탐관오리의 독촉으로 인해 죽을 지경에 놓인 농민들에 대한 현실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현실을 반영한 다산의 문학은 ‘유자는 어디에 처해도 현실을 있지 않는다.’ 는 선비정신의 발로로, 세상 사람을 생각하는 溫柔敦厚(온유돈후) 인 것이다. 온유는 성품이 따스하고 부드럽다는 뜻이고 돈후는 인정이 두텁고 두텁다는 뜻으로 인정을 곡진 하게 드러내는 참된 내용의 시를 평할 수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다산의 농민을 소재로 한 시들은 현실 참여적 자세로 세상의 풍속을 교호해 나가는 데에 온유돈후한 시였습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詩(시) 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임금을 사랑하거나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고, 시대를 아파하거나 풍속을 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찬미하고 풍자하고 善(선)을 권장하고 惡(악)을 징계하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산은 이 편지에서 나라를 근심하고 동시에 임금을 좋은 임금이 되게 받들고 민생을 염려하기에 안타까운 시대 풍속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선정을 찬미하고 포악한 정치를 풍자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고자 하는 마음의 참된 바판정신을 가지는 것이 시를 짓는 사람으로서 먼저 간직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다산은 강진의 유배지에서 보고 느낀 현실의 아픔을 시로 형상화 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 할 수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진정한 선비정신을 지닌 유자 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Reference
아직 배움의 단계라 정확한 정보가 아닐 수 있습니다.😂
피드백은 seoungin1228@gmail.com 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 윤인현 저) 조선후기 유자(儒者)의 유배 한시 연구-다산·추사·면암 중심으로)